【더・홀리・블러드】
1
"꿈이 끝나는 땅......" 위스키 글라스를 계속해서 닦으며, 인덜지는 혀가 굳은 듯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말이란 말인가."
가게에 손님은 한 명도 없다. 인덜지가 말을 걸고 있는 상대는 술집 구석에 장식된 등신대 인형이었다. 아니,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형은 아니었다. 동작을 정지한 오이란드로이드인 것이다. 서부개척시대의 창녀를 떠오르게 하는 드레스로 꾸며져, 공허한 미소로 허공을 보고 있다.
가게의 꾸며진 상태 또한 서부시대 취향이다. 그러나 군데군데가 뒤틀려 있다. 신단이 놓여 있고, 횻토코와 오카메 오멘이 장식되어 있으며 처마 끝에는 갈색으로 시든 카도마츠*가 놓여 있다. 계산대 옆에는 전동으로 팔을 상하로 계속해서 흔드는 마네키네코가 놓여있다. 자기장 폭풍 소실에 따라 네오 사이타마의 전자적 컬쳐가 확산된 영향이다.
*카도마츠(門松)란 새해 문 앞에 세우는 장식용 소나무를 말한다.
"......왜 그래? 카라."
인덜지는 카라의 웃는 표정이 신경 쓰였다. 그런 것은 거짓이다. 하지만 인덜지는 글라스를 내려놓고서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가 카라의 하얀 뺨을 어루 만졌다.
"불안한가?"
"......"
유리를 방불케 하는 카라의 루비빛 눈. 그 시선을 따라 인덜지는 고개를 돌렸다. 갈색으로 메마른 대지. 언덕. 메마른 경치에 사람의 기척은 없다.
아메리카 대륙 서해안. 이 살롱에서 그 전설적인 문자 간판은 그리 멀지 않다. H O L Y B L O O D. 전자전쟁 이전에는 다른 단어였지만, 긴 세월과 반달리즘이 간판의 문자를 그렇게 바꾸었다. 야만스러운 놈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자행된 모독이다.
발단은 서기 2000년. 그 결정적인 붕괴가 일어난 후, 문명이 열화되고 질서가 상실되는 데에는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달콤한 향기와 분홍빛 저녁 하늘, 야자수, 회색 콘크리트. 그러한 것은 모두 과거의 것들이다. 아니...... '시티'라는 궁궐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러한 것들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들어갈 수 없는 벽 너머에서는 파릇파릇한 야자수가 바람에 흔들리고, 태양 발전 패널이 자랑스럽게 늘어서 빛을 받으며, 잘 자란 싱싱한 시푸드를 먹어치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누가 말을 꺼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세금을 내는 일이 있을까 보냐?' 라고. 사회복지 쪽 돈이 자신들을 위해서는 쓰이지 않고 있다. 공무원들에게 쓸데 없이 새어 들어가, 관리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다. 그러한 주장을 한 부자들은 서로 어깨를 걸고 새로운 '시티'를 억지로 형성했다. 자신들의 돈으로 인프라를 갖추고, 경비원을 고용하여 기존의 지자체에 대한 납세를 거부했다. 말하자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극점, 궁극의 이기심이다.
그 결과 변두리의 가로등은 밤이 되면 불이 꺼지고, 갈라진 아스팔트 정비는 뒷전으로 밀렸으며, 도서관에서는 책이 없어지고, 학교는 폐쇄되고, 경찰의 규모는 축소되었으며, 하수도는 하얀 악어로 넘쳐나고, 매일 같이 보험금을 노린 화재가 일어나게 되었다.
IP 어드레스인지 뭔지를 둔 쟁탈전이 계기가 된 전자전쟁이 일어나자, 그 흐름은 더욱 노골적인 것이 되었다. 거대한 벽이 세워진 것이다. 그것이 '시티'의 시작이다.
벽을 넘어 침입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개틀링포 소사가 인정사정 없이 이루어졌다. 침입을 시도하는 자들이 나타날 때마다 벽은 더 높아졌다. 총성이 울릴 때마다, 폭발이 일어날 때마다, 고통 받는 자들이 울부짖을 때마다 벽 바깥의 문명은 조금씩 갈색으로 메마르고, 녹슬고, 칙칙해졌다.
이 살롱의 이름은 그 전설적인 하얀 간판에서 따왔다. H O L Y B L O O D. 너무나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계시를 방불케 했다. 드넓은 이 땅에, 과거 가진 자 없는 자들의 피가 흘렀던 것이다. 그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성불할 수 없지 않겠는가.
"저건 회오리바람이야, 카라." 인덜지가 속삭였다. 지평선에 우뚝 선 무시무시한 그림자에 눈을 흘긴다. "늘 있는 일이지."
"......"
카라가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불안한가? 블라인드를 내리는 편이 좋을까?"
"......"
"알겠어. 어차피 곧 밤이 올 거야."
인덜지는 블라인드 끈을 당겼다. 줄무늬 모양 그림자가 살롱 바닥에 박힌다.
"꿈을 가지고 계신다면 싸게 드려요......"
그는 중얼거리며 다시 옆으로 가로질러 카운터 안쪽의 정해진 위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반들반들하게 닦인 글라스를 다시 집어든다.
"......"
인덜지는 손을 멈추고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의 닌자 반사신경이 이방인의 기척을 포착했다. 그는 땀을 흘리며, 강한 긴장감에 가슴을 세게 누르며 심호흡했다. 1초 후, 덜컹 소리를 내며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먼지투성이 바람이 불어 닥친다. 인덜지는 숨을 내쉬며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닫아줘, 손님......"
"하악-...... 하악-......!"
키가 큰 그림자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흔들린다. 심상치 않다.
"후욱-......!"
힘이 다해 무릎을 꿇는다.
"어이고 어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인덜지는 볼케이노 권총을 청바지에 찔러 넣고, 어색한 발걸음으로 입구 쪽으로 향했다.
"여기서 죽으면 누가 댁을 관짝에 넣느냔 말이야."
"그대가 점주라면, 미안하지만 당신이 해줘야겠지."
남자는 대답하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인덜지를 올려다 보았다. 짧게 깎은 하얀 머리, 오래된 상처 투성이인 얼굴.
"......흥. 닌자로군." 인덜지는 코웃음을 쳤다. "폭발사산할 기력도 없어 보이는데."
"물 좀 받을 수 있을까."
"여기서 진짜 물은 귀중품이야. 돈이 필요해."
"......" 닌자는 품속에서 바닥으로 금조각을 던졌다. "이걸로 충분한가?"
"뭐어, 괜찮겠지."
인덜지는 고심 끝에 몸을 숙여 금조각을 주워 들었다.
"댁, 이름을 대게. 나는 인덜지. 이 홀리 블러드의 점주야. 스스로를 지킬 필요가 있어."
"이 어르신은......" 닌자는 목을 울리며 글라스에 담긴 물을 들이켰다. "이 어르신은 니드호그."
"닌자로군."
"보는 대로지. 그대도 그렇지?"
"그렇고 말고. 다리 상태는 좋지 않지만, 이상한 짓을 한다면 바로 정수리를 때려 날려 버리겠어."
"방은 비어있는가. 묵을 곳을 잡고 싶네만."
니드호그는 카운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보시는 대로지."
인덜지가 니드호그의 말에 대답했다. 니드호그는 추가 요금을 카운터에 던졌다. 인덜지는 재빠르게 그것을 주워들고서 이로 씹어 확인한 뒤 품안에 넣었다.
"도-모. 요로콘데."
"원기를 북돋워야겠는데." "아이요(네)."
인덜지는 버팔로 로스트 스시를 접시에 담고, 놋쇠 맥주잔을 연한 맥주로 가득 채웠다.
"돈과 예의를 보이는 자는 손님이지. 즉 유우죠우(우정)다. 즐기시게나."
니드호그는 씹어 삼키며 들이켰다. 먼지와 피, 흙투성이였던 닌자는 그제서야 마침내 제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디서 왔나, 당신은." 인덜지가 질문했다. "마치 밖에서 지나가는 회오리바람에 타서 온 것 마냥 두들겨 맞은 모양새던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게지." 니드호그가 인정했다. "말(馬)도 없고, 사람이 있을 법한 마을 방향도 알 수가 없어서 말이야."
"...... 홀리 블러드는 애처로운 손님을 환영하지." 인덜지가 말했다. "여기서 밤을 새고 나면 어디로 가지?"
"이 어르신께서 오히려 묻고 싶군."
"이 땅에서 당신과 같은 요란한 아웃사이더에게 열린 문은 그리 많지 않아. 왔던 길을 돌아가는 건 어떤가?"
"그게 가능하다면야......" 니드호그는 빈 맥주잔을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고생도 안하지."
인덜지는 입구를 노려보았다. 덜컹. 거칠게 문을 열고서 우당탕탕 엔트리한 것은 3인조 닌자였다.
"카악! 엄청난 바람에 회오리까지...... 웃기지도 않는 땅이군. 곧 폭풍이 오겠어, 아재." 앞장선 닌자가 인덜지에게 말했다. "일단 술과 스시를 내놔."
"댁들도 닌자로군. 이름을 대주실까. 그게 이 가게의 룰이라서 말이야. 나는 인덜지다."
인덜지가 아이사츠했다. 앞장선 닌자는 불쾌한 것 같았지만, 아이사츠를 받았다면 응해야 하는 것이 예의다.
"블러드스테인이다." "도-모. 블러드스테인=상."
겨우 문을 닫은 부하로 보이는 두 사람도 리더에 이어서 아이사츠를 했다.
"나는 플레처." "아이아가트다." "도-모. 플레처=상. 아이아가트=상."
"거기 찌든 닌자...... 네놈도 이름을 대라."
블러드스테인은 갈고리가 달린 쿠나이 클리버*로 위협적으로 니드호그를 가리켰다. 그는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있었지만, 귀찮은 듯 신음소리를 낸 뒤 시큰둥하게 아이사츠를 돌려 주었다.
*클리버(Cleaver)는 손도끼 내지는 중식도와 닮은 나이프다.
"......니드호그." "니드호그. 어디서 왔지?" "여기는 아니야. 이야기하면 길어진다." "흥......"
블러드스테인은 수상쩍다는 듯 상처입은 닌자를 보았다. 플레처와 아이아가트는 속닥속닥 무어라 이야기를 나눴다.
"뭐, 됐어."
누군가 찾는 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것일까. 좀 더 요란한 목적일까. 그러나 어쨌든 니드호그가 그 인물이 아니라 판단한 세 사람은 거드름을 피우며 창가의 테이블 석에 자리를 잡았다. 인덜지는 사람 수만큼 맥주잔을 나른다. 그리고 로스트 버팔로 스시를.
KRACK......! 번개 소리가 가게 안까지 퍼졌다. 번개에 쫓기듯 새롭게 엔트리한 자가 있었다.
"......더러운 모텔이군."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해골 무늬의 복면으로 코 아래를 감춘 깡마른 남자였다.
여자를 데리고 있었다. 여자는 입술도, 머리카락도 까만색, 쇄골에 걸쳐서 목걸이와 닮은 다이아몬드 피어스가 피부에 박혀 있었다. 여자의 드러난 어깨에는 양귀비 네온 타투가 불길한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걸치고 있는 얇은 가죽 장속에서는 우아한 곡선의 허리와 배꼽이 드러났다.
남녀 모두 거무죽죽한, 살인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점은, 살인자의 눈을 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선 가게에 있는 다른 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즉, 닌자의 눈이다.
"들어오자마자 '더러운 모텔'이라니, 상당히 수준 높은 아이사츠로군." 인덜지는 젊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흥. 역시 닌자인가. 뭐, 닌자도 아닌 놈이 이 땅을 무사히 오갈 수 있을 턱이 없겠지."
"오모테나시*를 해라, 점주."
*오모테나시란 접대, 환대를 의미한다.
남자는 앞뒤 가리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건 스핀을 방불케 하듯 수리켄을 회전시키면서 위 아래로 움직였다. 여자는 복잡한 릴리프*가 새겨진 납빛 소화용 도끼를 바닥에 꽂아 세웠다. 여자는 얼음을 방불케 하는 눈빛을 번뜩였다.
*릴리프(Relief, 돋을새김)란 조각에서 평평한 면에 글자, 그림 등을 도드라지게 새기는 것을 말한다.
"잠자코 머리를 조아리거나, 이 녀석으로 강제적 오지기를 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르게 될 거야."
"허세를 부릴 상대를 잘못 고르면 손케이를 잃을 뿐이다. 영스터(youngster)."
인덜지는 엄숙하게 말했다. 블러드스테인의 등에서 살기가 고개를 쳐들었다. 플레처와 아이아가트가 품에 손을 넣고서 자세를 취했다. 니드호그는 말없이 가만히 그들을 응시했다.
"......흥. 뭐, 좋아."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두드린 뒤 인덜지에게 돈을 던졌다.
"우리들이 바라는 건 휴식이다."
"그렇겠지." 인덜지는 돈을 받아들었다. 여자는 혀를 찼다. 인덜지가 말했다. "손님이 되고 싶다면, 이 다음엔 아이사츠다. 이름을 대라, 젊은 닌자. 그게 이곳의 룰이다. 나의 이름은 인덜지."
"아이사츠라고?"
남자는 가게를 둘러 보았다. 아이사츠를 받으면 그에 응해야만 한다. 블러드스테인은 위험한 시선을 던지며 말없이 재촉했다.
"......내 이름은 스컬호드다." "나는 세데이트."
인덜지는 두 사람이 이름을 댄 것에 만족한듯 끄덕였다. 다른 닌자들도 아이사츠에 응했다.
"적당히 앉게. 알겠나. 이 가게에서 싸움은 금지야."
KRACK! KA-BOOOOM! 블라인드 너머로 섬광이 새어 들었다. 소리는 가까웠고, 가게 조명이 깜빡깜빡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하! 낙뢰인가?" 블러드스테인이 웃었다. "이 가게째로 우리를 분쇄할 셈일지도 모르겠군. 이 빌어먹을 폭풍의 주인은."
그 때 다시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앞으로 고꾸라지듯 또 한 사람, 손님이 들어왔다.
"아...... 다행이다. 영업하고 있군요. 다행이야."
사라리맨 슈트 차림 남자는 손수건으로 비에 젖은 얼굴을 닦고, 금이 간 안경을 벗었다. 그는 가게 안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고서 그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에 즉시 응했다.
"아...... 도-모. 저는 사가사마 미네입니다. 치카하 사의 사라리맨 닌자입니다. 사전 예약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1박 가능할까요? 보시다시피 밖이 저 모양이라서요."
KA-BOOOOM!
"아아! 또 번개가 떨어졌군요....... 아니 그게, 장사 이야기 때문에 기업의 소형 제트기를 타고 북쪽으로 비행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어쨌거나 날씨가 날씨라서요. 멋지게 당해버렸습니다. 불시착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습니다만...... 아이고야."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떠벌떠벌...... 그 기분 나쁜 입을 다물어라. 그런 꼴로 닌자라고?" "아이엣......" "장소를 잘못 고른 놈이군. 마음에 안 드는데."
블러드스테인이 위협하자, 플레처와 아이아가트도 이를 따라 노려보았다. 사가사마는 붙임성 있는 웃음으로 이를 받으며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탕탕. 문이 다시 소리를 냈다. 사가사마는 황급히 뒤돌아 보며 문을 열어 주었다.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나타난 것은 몸집이 작은 십대 아가씨였다. 가게 안의 닌자들은 다들, 당연하다는 듯 그 아가씨가 닌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닌자의 외견 연령에는 큰 개인차가 있다. 그리고 그 격차가 큰 자들은 대개 위험하다.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것을 피부로 느끼고 이해하고 있는 자들 뿐이었다.
아가씨는...... 상의를 어디선가 잃어버렸는지...... 마치 근처에 산책이라도 나가는 것 같은 탱크톱 차림에, 왼쪽 상완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는 자못 얕았고, 워크 팬츠에 말라 붙은 핏자국은 그녀 자신의 것은 아닌 듯했다. 허리에 매달고 있는 무지막지한 권총이 의도하지 않아도 눈길을 끈다. 49 매그넘. 이 시대에서도 한 지방에서만 괴팍한 장인이 계속 단조하고 있다던가 하는, 불온한 회전식 권총이다.
"......이름을 대라. 이 여관에서 대접을 받고 싶다면. 나는 인덜지."
반복, 반복, 계속 이뤄진 행위다. 아가씨는 모자를 의자에 던진 뒤 이름을 댔다. '아주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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